나의이야기

나의 친정집 청송초등학교

무숙자 2015. 1. 13. 13:16

2010,06,08

 

나의 친정집 청송초등학교

 

첫 직장을 ‘직장의 친정’이라고 하는데 나의 직장의 친정은 청송초등학교이다. 첫 직장은 많은 일들이 기억되고 그래서 유난히 추억거리가 많다.

 

1970년 2월에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3월 1일 날짜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했음)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인터넷이 없는 그때는 초중등학교 발령사항을 KBS대구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일일이 이름과 임지를 육성으로 전했고 지방의 석간신문에 호외로 활자화 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라디오에서 임지를 확인 하고는 3월2일 영천버스 정류장에서 이른 아침에 청송행 버스를  탔다. 고향이 청송 부남인 친한 친구가 농담 삼아 자기 고향에 오라고한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먼 곳 객지로 떠나는 손자를 염려해서 할머니께서는 빨간 이불을 사주셨다. 영천 읍내를 잠깐 벗어나니 양 옆으로 미루나무가 심어진 비포장 도로의 신작로가 계속 이어진다. 청송이 대단한 골짜기라는 것만 알았지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낯선 곳이다.

 

버스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높은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서 한참을 달렸다. 조금 큰 마을이 보인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저곳이 청송입니까?”

“청송은 온 만큼 더 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먼곳이라니..." 말 듣던 대로 대단한 골짜기이구나.

 

4시간만에 드디어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사이렌 소리가 웨엥~~~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 시계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면사무소에서 사이렌으로 정오를 알리던 때였다.

 

교육청을 찾아가야 한다. 들고 간 이불 보따리를 교육청 현관 앞에 얹어 두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처음 발령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제법 나이가 많으신 장학사 한분이 반긴다.

”청송은 오지가 많은데 가까운 소재지 학교인 청송국민학교에 임지가 배정되었으니 열심히 하세요“

 

‘국민학교 교사에 임함. 청송국민학교 근무를 명함, 29호봉을 급함. 1970년 3월 1일. 경상북도 교육위원회 교육감‘ 이라고 적힌 발령장을 손에 들었다.

 

그때 청송군으로 발령이 난 우리 동기생이 8명이었는데 각자의 임지로 흩어 졌다.

당시에 청송에 발령 받아 오는 공직자를 위로 하는 말이 ‘청송은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다‘ 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너무 먼 골짜기라서 처음에는 실망스러워 울었을 것이고, 살다보니 물 맑고 인심 좋은 곳이라서 떠날 때는 정이 들어 울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교통이 불편한 벽지이기는 하지만 군청소재지로서 각종 기관이 있었고 읍소재지이니 생활하는데 큰 불편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읍내 가까운 곳에 유명한 약수탕이 있었고, 지금은 국립공원인 주왕산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 청송초등학교에서 햇병아리 교사인 나는 좌충우돌 하면서 나름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온갖 열정을 바쳤다.

군청 소재지인 만큼 학교 규모나 시설이 뒤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18학급에 1300여명의 아이들이 공부했다. 몇해전에 옛 생각이 나서 근무한 학교를 방문해보니 지금은 12학급에 250여명의 아이들이 전부였다. 도시로의 진출로 시골학교가 동공화 되어 가는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 당시에도 내가 근무한 학교는 교실과 교무실 간에 인터폰이 설치되어 있었고, 운동회 때에는 와이어레스 마아크를 목에 걸고 운동장 구석을 헤집고 다녔으니 도시학교에서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시설이었다. 당시에 졸업생인 재일동포 재력가의 도움으로 시설을 했었다. 전교생이 수용되는 큰 강당이 지어졌고 독립된 도서관도 개관되었으니 도시 학교도 이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그때 가르쳤던 아이들이 이제는 중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돌이켜 보면 아쉬운 일도 많다. 젊은 나이에 열정은 있었지만 가르치는 요령도 기술도 부족 했었다. 지금 알고 있는 지혜를 그때에도 알았다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항상 많다.

그래도 그때의 학부모는 학교의 교육방침이나 교사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믿고 맡겼지 간섭하거나 자기 자식만 잘하면 된다는 이기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  주먹다짐으로 코피를 흘리는 일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요즘 학교에서 문제되는 왕따나 학교폭력등은  없었다. 그때는 비록 물질은 좀 부족했지만 마음이 다급하고 이기적이지는 않았었다.

 

학교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면, 맑은 물이 흐르는 넓은 개울인 용점천이 나온다. 공부가 지루해질 무렵이면 내가 맡은 6학년 반 아이들 63명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미꾸라지도 잡고, 다슬기도 채취하고, 물놀이도 하면서 목욕을 시킨 후, 화단에 깔 동글동글한 자갈을 주워서 손에 쥐고 교실로 데리고 가던 그때 그시절이 그립다.

 

시골에서는 겨우  흑백 텔레비전이 막 보급되던 때이었으니 총천연색(컬러) 영화는 극장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학습방법을 개선하고자 시청각 교재를 교실에 도입하고자 하는 초창기 시도에서 그 역할을 내가 주로  맡아서 했다.    환등기로    슬라이드를 비춰서 컬러로 그림을 보고, 16mm영사기로 필름을 걸어서 영화를 보는 일은 내가 맡은반이 항상 먼저였다. 지금이야 DVD로 아주 간단히 볼 수 있는 자료이지만 40년전인 그 당시는 획기적인 자료 활용 방법이었다.

그때의 제자들을 만나면 지금도 그때 교실에서 영사기를 돌려 영화를 보던 때를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반에서 영화를 볼때이면 옆반 아이들이 복도를 지나가다 고개를 빼서 들여다 보곤 했다‘ 고 기억한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제들과의 만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억력이 좋은 젊은 때였고 그것도 첫 직장에서 만난 아이들이라서 그들의 이름을 떠 올리면 그때의 얼굴 모습이며 성격들이며 사는 동네 까지를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해 낸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나는 일년에 한차례 정도 직장의 친정인 청송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곤 한다.

생각해 보면 즐거운 추억이 많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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