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이야기

작은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무숙자 2015. 1. 14. 14:01

2012년 03월 15일

 

작은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난 후 첫돌이 될 무렵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께서는 전투경찰로 차출되어 전쟁에 참여 하시게 되었다. 남편을 전장에 보낸 어머니께서는 늘 불안한 마음으로 시부모를 모시면서 어린 나를 키우셨다.

 

1950년 8월에 내가 사는 마을 인근까지 북한군이 밀고 들어 왔다. 사람들은 급히 피난을 가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선 먹을 양식만 등에 지고 남쪽에 떨어져 있는 금호의 강변까지 가서 피난살이를 했어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가끔 그때 피난길의 고생스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신다.

“아이고! 니가 명이 길어서 살은 기라. 그때 그 국군을 만나지 못했으면 니는 죽고 없는 기라.”

 

피난길에 나설을 때는 이제 겨우 첫돌을 지난 후 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났고 어머니 젖도 충분치 않아서 튼튼하게 자라지는 못했다.

게다가 어려운 시절이라 부자집 아이가 아닌 이상 우유를 먹여 키우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 어린 아이를 업고 전쟁의 포성을 피해 피난을 가야만 했으니 삶이 얼마나 고단 했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지라 어머니 등에 업힌 나는 심한 설사를 하게 되었다.

오뉴월의 뙤약볕에 피난 가는 길의 물 사정과 우물의 위생상태가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머니 등에 업힌 나는 고개를 젖히고는 눈을 감고는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가 숨이 멈추면 버릴려고 했다.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버릴 수 없으니 죽을때 까지만 업고 가는 것이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 보다는 전쟁에서 피곤함이 일상을 지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피난길 옆 보리가 익어가는 이랑 사이에는 숨을 거둔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의 주검이 더러 더러 보였다.

주검을 일상으로 보면서 피난길에 올랐으니 아이가 죽더라도 크게 통곡할 여유도 없을것 같다.

어머니는 아이가 죽었나 싶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직 숨을 거둔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는 여전히 젖혀진 상태로 유월의 뙤약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그때 피난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전지를 따라 국군이 행군하고 있었다.

국군이 지나가다가 등에 업혀 의식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발견했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 아이가 왜 이래요? 어디가 아파요?”

안타까운 표정이다.

“ 예 많이 아파요. 설사를 심하게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왜 이렇게 되기까지 그냥 두었냐는 듯한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국군은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어머니에게 하얀 알약 세개를  꺼내 주었다.

"이것 조금씩 먹여 보세요.”

국군은 고맙다고 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이 급히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뛰어 갔다.

 

어머니는 등에 업혀있는 아이를 내려서 약 한 알을 물에 녹여 얼른 먹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다시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금호 강변으로 갔다.

어머니는 강변에 도착하여 등에 업힌 아이를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고개를 세우지 못하고 목을 젖히고만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아이는 눈동자를 말똥거리면서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았네.”

어머니는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감격했고, 약을 준 국군이 고마워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약 한 알에 설사를 멈추고 눈을 뜨고 다시 산 것이다. 약이라고는 먹어 본 적이 없었으니 약효가 최대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다시 살아서 어머니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

 

북한군을 물리치고 전세가 안정되어서 사람들은 피난살이을 끝내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서 쌀미음을 먹은 아이는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회복하여 성장 하였다.

 

"그러니 그때 그 국군을 만난 덕분에 니가 다시 산기라."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그 국군을 만나지 못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관심을 보인 국군 덕분에 나는 이 세상에서의 명을 다시 잇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참 감사한 국군이셨다. 전시라서 전투를 하기에도 심신이 지쳤을텐데 지나가는 피난 행렬의 고단함도 같이 한 국군이라  더욱 훌륭한 군인이라고 생각 되었다.

 

이렇듯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작은 관심이 누구에게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지금껏 훌륭한 국군, 내 생명의 은혜로우신 분을 생각하고 그 분의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 그분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다.

그렇다. ‘작은 관심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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